서양 주얼리의 역사(3) - 로마
속이 빈 두 개의 금 구를 붙여 제작한 로마시대 귀걸이. 두 개의 구 사이에는 꽃 모양의 장식이 있다. 이 귀걸이는 팔찌에 연속적으로 사용된 구슬 부분 중 한 쌍을 떼내어 귀걸이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중동 아시아, 특히 시리아에서는 장식적인 면에서 헬레니즘 양식이 매우 풍성해 기원후 첫 세기까지 그 스타일이 지속됐지만 로마의 세공인들은 간소한 미를 추구했다.
에트루스칸 주얼리가 거부했던 정교함을 사용했고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었으며, 반구형으로 연마된 금팔찌와 귀걸이 등 로마인들의 간단하지만 견고한 주얼리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로마 주얼리의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색채이다. 에메랄드, 가넷, 사파이어, 토파즈, 진주, 아게이트, 다이아몬드 등 지금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귀보석과 준보석을 로마 사람들도 사용했다. 경도가 그다지 높지 않은 보석들은 캐보션(cabochon)으로 연마하여 사용했고 경도가 높은 보석들은 릴리프로 조각했다.
거의 대부분의 로마시대 주얼리는 동로마제국에서 제작됐다. 로마의 주얼리들은 물론이고 전 유럽 지역에서 발견되는 동시대 주얼리들도 로마시대 주얼리를 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개중에는 로마식의 견고한 주얼리 스타일과 달리 장식적인 소재들과 유색 보석이 쓰였던 헬레니즘 양식의 주얼리로 제작됐음을 증명하는 것들도 있다.
순수한 로마의 주얼리로 처음 발견된 것은 로마 내부의 정치가 재정비되기 시작한 기원전 27년이다. 처음 2세기 동안의 로마 주얼리는 그리스 헬레니즘의 작업 방식과 디자인의 영향을 받아 제작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단순함과 큼직함이 주얼리에 적용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그리스식 스타일이 사라지면서 로마 고유의 스타일이 자리잡게 된다.
기원 후 2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주얼리 수공업자들은 그리스 스타일에서 완전히 해방됐고 두 개의 새로운 기술 방식을 선보이게 된다. 그 중 하나는 얇은 금판 위에 조각칼을 사용해서 투각효과를 낸 Opus Interassile라는 기법이다. 처음에는 단순하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세련돼졌고 비잔틴 시대에 이르러 스타일이 완성됐다. 다른 하나는 상감 기법으로 로마인들은 그리스 시대에 이미 무기 제작에 쓰이던 기법을 주얼리 장식에 응용했다.
A.D.79년 베수비오(Vesuvio) 화산 폭발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주얼리는 소멸됐지만 다행히 폼페이(Pompei)와 에르콜라노(Ercolano)에서 발견된 로마시대의 주얼리로 시대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1세기의 로마 주얼리 머리장식은 당시 유행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사용된 흔적이 보이는데, 특히 금으로 만든 머리화관은 헬레니즘 양식보다는 에트루스칸 양식에 가까운 디자인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의 로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기원전 390년 Plinio의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 사용된 금의 양은 1000libbre(1 libbra: 약 380g)를 초과하지 않았다.
베수비오(Vesuvio) 화산 근처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다색의 로마 시대 목걸이.
이 목걸이는 아주 단순히 금 구슬과 진주, 혹은 단순하게 연마된 보석을 꿰어 만든 것으로 로마시대의 패션을 알 수 있는 좋은 증거물이다. 로마의 주얼리에 사용된 보석은 동양과 그리스의 주얼리와 상반되게 아주 단순하게 다뤄졌다.
BC 4세기 중반 로마는 이탈리아 중앙에서 지배권을 갖게 됐고, 에르투스칸을 정복한 후 부분적으로나마 상황이 좋아졌다. 제국이 성장하면서 주얼리 제작은 북아프리카, 스페인과 동방으로 넓어졌으며 일정하게 물건을 보급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금의 보급량은 아직도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부족했다.
당시 로마는 정복한 영토에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로마 의회는 이를 유지하기 위해 1g의 금이라도 그들의 손을 거치도록 했다. 그래서 두 개의 절약에 관한 법이 하나는 기원전 5세기에, 다른 하나는 기원전 3세기에 공포됐다. 처음에 제정된 법은 모두 12개의 조항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죽은 사람과 함께 매장할 금의 양을 법적으로 정해둔 것과 여성들이 15g 이상의 금장신구를 착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3세기가 흐르는 동안 로마의 주얼리는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의 것으로 발견되는 로마의 주얼리는 에트루스칸과 헬레니즘 스타일의 주얼리다.
검소함이 배제되고 복잡한 작업장식이 사용되면서 더이상 복제를 허용하지 않았고 주얼리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후에 로마의 주얼리는 단순한 주얼리라기보다 그림이나 조각 부분의 예술이라고 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로마 주얼리는 비잔틴 주얼리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에 중요한 의미를 둘 수 있다. 로마인들은 주얼리의 관심을 금에서 보석에 관한 것으로 옮겨놓았고 약 3000년 전 수메르 시대에 사용됐던 디자인의 깨끗함과 단순함을 다시 적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