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인어로 둔갑한 바로크 진주
진주가 구형이 아닌 제멋대로 생긴 것을 바로크(Baroque) 진주라고 부른다. 바로크 진주는 대부분이 천연진주이다.
조개 속에 들어간 이물질의 형태가 온전하지 못해 그 위를 덮은 분비물 역시 구형이 되기가 어려우며, 불규칙한
형태가 된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는 바로크 진주가 크게 유행했다. 형태가 불규칙하고 크기가 큰 진주일수록
사람들은 열광했다. 보석 세공인들은 그런 대중들의 기호에 따라 바로크 진주를 이용하여, 용이나 인어와 같은
기괴한 상상 속의 동물이나 돌고래 형상 등을 펜던트나 장신구 등으로 만들었다.
이런 바로크 진주 중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캐닝보석(Canning Jewel)’으로 유명한 남자인어상으로 세공된
진주이다. 거의 모든 보석관련 서적에는 이 바로크 진주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 진주는 인도 총독을 지내던
캐닝(Charles Canning)이 1860년 경 인도에서 구입하였다고 한다. 어떤 문헌에서는 그가 인도를 위해 펼친 훌륭한
정책에 대한 감사의 선물로 받은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것을 입수한 경위가 무엇이든 그가 인도 총독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그의 짐 속에 이 보석이 들어 있었으며, 그 후 ‘캐닝보석’으로 불려지고 있다.
캐닝보석은 약 10cm 정도의 큰 진주로 근육이 잘 발달된 건장한 사람의 몸통을 닮았다. 장인은 이 몸통에 금과
에나멜을 이용하여 남자인어의 하체를 완성했다. 그 하체는 다시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었다. 이 보석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 장인의 걸작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보석 전문가들 중 아마도 이 작품이 르네상스
이후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이도 있다. 그 보석에 장식된 다이아몬드의 컷팅 기술이 당시로서는
어렵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인어의 꼬리에 부착된 큰 루비 역시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르네상스 이후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그 보석을 만든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런 형태를 가진 큰 진주가 르네상스 풍의 디자인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보석관련 서적들에서 이 보석은 르네상스 시대의 보석으로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보석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1935년 26,000달러에 구입하여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는 품목 중의 하나이다.
사실 바로크 진주는 기괴한 형상을 한 동물을 만든 것만 있는 것은 아니며, 백조나 펠리컨 등 보통 우리와 친숙한
동물들로 만들어진 것도 역시 많다. 유럽의 왕실, 특히 영국 왕실에서 여왕들은 진주를 선호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보면 의례히 어딘가에는 큼직한 진주 보석들이 보인다. 특히 엘리자베스 1세는 진주를 선호해서 당시 상류사회의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다.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진주를 사용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도 역시 진주는 권위의 상징처럼 사용
되었다. 혁명에 의해 축출된 이란의 팔레비가 대관식에 사용한 파라 왕비의 왕관에도 큼직한 바로크 진주가 균형 있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 진주는 오랜 기간 동안 보석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왕족이나 귀족에게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진주가 1905년 일본의 미키모토 고이치에 의해 진주 양식이 성공을 거두면서 진주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
초창기 전통 보석업계의 양식진주에 대한 냉대는 매우 거셌다. 티파니사가 1956년까지도 양식진주를 판매하지 않은 게
단적인 예이다.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천연진주의 거래량은 가격기준으로 전체의 10%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나
캐닝보석의 몸통을 만든 천연진주가 아니더라도 천연진주의 가치는 같은 질과 크기의 양식진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양식진주는 껍질부분을 벗겨내면 진주층이 아닌 다른 물질이므로 이런 차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출처:보석, 보석광물의 세계, google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