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법사들
빛이 없으면 색도 없다. 만질 수 없으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재료 ‘빛’을 이용한 9인의 아티스트 혹은 마법사들이 디뮤지엄의 9개 방을 밝혔다.
카를로스 크루즈-디에즈의 ‘Chromosaturation’.
한남동 미술 벨트를 형성할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기대를 모은 디뮤지엄(D Museum)이 드디어 불을 밝혔다. 보통의 관객을 예술 안에 끌어들이는 출중한 기획력을 선보여온 대림미술관이 보다 확장된 공간에서 선보이는 첫 전시의 테마로 선택한 건 다름 아닌 ‘빛’. <스파셜 일루미네이션 Spatial Illumination-9 Lights in 9 Rooms>이란 이름으로 대규모 라이트 아트 전시를 개막했다. ‘라이트 아트’라는 말이 낯설긴 하지만, 밤하늘을 수놓은 폭죽이나 잉고 마우러가 만든 조각 작품 같은 조명을 떠올리면 빛과 예술을 연결하는 게 그리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경사진 골목, 디뮤지엄이 자리한 비정형의 건물을 마주하면서부터 ‘뭔가 다른’ 예술적 자극에 대한 설렘이 싹튼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9개의 또 다른 문이 기다리고 있다. 네온으로 만든 이름표가 달린 문을 하나씩 열고 들어가는 복도식 전시 구성으로, 방마다 서로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과 조우하게 된다. 제품 디자이너, 미디어 아티스트, 사운드 엔지니어 등등 빛을 소재로 다룬다는 점만 동일할 뿐 9인 작가들의 이력과 작업 스타일도 다채롭다. 플린 탈보트는 빛이 얼마나 다양한 색과 형태로 변주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하얀 종이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폴 콕세지의 대형 설치 작품은 신기한 마술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듯하다(전시 첫 날 <엘르>가 직접 만난 두 명의 인터뷰를 만나보자). 참여 작가들도 감명 깊었다고 말하는 옵티컬 아트의 거장 카를로스 크루즈-디에즈의 작품은 단연 하이라이트. 공간을 가득 채운 빛과 색이 일으키는 시각적 착란에 오랫동안 빠져들게 한다. 매일 똑같은 형광등 아래서 빛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전시를 보고 난 뒤, 어떤 이는 집이나 사무실 천장에 달린 조명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기 마음속의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효과를 실험한 데니스 패런의 방.
한남동의 새로운 문화예술 아지트 디뮤지엄의 전경과 실내.
자신의 작품 ‘Bourrasque’ 아래에 선 폴 콕세지.
Paul Cocksedge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제품 디자인을 전공한 폴 콕세지는 졸업 후 잉고 마우러의 개인전에 참여하면서 조명 디자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런던 디자인 뮤지엄 등에서 전시를 개최했고 플로스, 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와 협업하고 있다. 바람에 종이가 휘날리는 듯한 조명 작품이 인상적이다. 디뮤지엄에 설치된 모습을 본 소감은 2011년 프랑스 리옹 ‘빛의 축제’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살짝 접힌 종이의 모양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원래 야외에 설치했던 작품을 실내에서 선보이게 됐는데, 전시공간이 생각보다 크고 천장도 높아서 밖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두운 방에 관객들이 들어오니 조명이 사람들의 얼굴을 비추고 반사하면서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 느낌이다. 당신을 매료시킨 빛의 매력은 공부하고 발견할 게 무궁무진하다는 점. 오직 상업적인 목적으로 열리는 빛에 관한 쇼나 박람회는 싫어한다. 빛에 대한 아무런 탐구 없이 그저 빛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난다. 자칫하면 디스코텍 조명이랑 다를 게 없다. 이른 나이에 디자이너로 이름을 알렸다. 성공 비결은 돈이나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열정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것, 타협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창조력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중요한 일에 비하면 나 같은 디자이너나 그 결과물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물질주의를 부추기는 디자인에 반대한다. 개인적으로 요즘 과도한 육류 소비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주스 바 디자인 작업을 맡았다. 지금 당신의 집에 있는 조명은 잉고 마우러에게 선물받은 선으로 된 원형 조명. 내가 플로스와 협업해 만든 ‘셰이드’도 있다. 조명 갓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고안한 제품이다.
플린 탈보트와 그의 작품 ‘Primary’.
Flynn Talbot
호주 출신의 조명 디자이너이자 설치미술 작가 폴린 탈보트. 런던에서 자신의 조명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으며, 2010년 필립스에서 선정한 ‘올해의 젊은 디자이너 상’을 수상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두 개 작품에 대해 설명한다면 먼저 ‘Primary’는 빛의 3원색인 RGB 광원을 삼각뿔 형태의 오브제에 투영한 작품. 빛과 조각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색의 감성을 보여주고 싶었다. ‘contour는 인간의 지문에서 착안했다. 지문은 정체성과 연결되며, 지문의 형태인 동그라미는 무한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빛 속의 나를 보면서 내 안의 빛을 발견하는 체험을 디자인하고자 했다. 내 모든 작업은 빛과 사람을 연결하는 데 집중돼 있다. 빛을 다루는 작업을 하게 된 건 항상 ‘빛’의 마법적인 속성에 관심이 많았다. 10대 시절에는 건축을 좋아했으나 건축은 결과를 얻기까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나(웃음). 스스로를 컨셉추얼 디자이너이자 테크니컬 아티스트라고 정의하며, 늘 미술과 예술 사이의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전작 중에 원형 오브제 조명 ‘X&Y’가 있는데, 무형의 빛을 만지고 소유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내가 만든 조명이 누군가의 집, 누군가의 삶에 들어가서 빛을 전할 거라고 상상하면 더없이 즐겁다. 인생에서 목격한 가장 아름다운 빛 내 고향 퍼스 해변가의 저녁놀. 호주는 햇빛이 강한 도시라 노을 빛깔도 환상적이다. 빛을 이용한 첫 작품 ‘Horizon’도 바로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움직임에 따라 스크린의 색이 변화하면서 관람객들이 자신만의 노을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인터랙티브한 작품이었다.
(출처:E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