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0캐럿 다이아몬드 원석 '컬리넌'
1905년 1월 25일 오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미어 광산의 감독자로 일하던 프레데릭 웰스는 광산을 순찰하던 중 돌 더미 속에서 석양빛에 반짝이는 물체를 발견하였다. 평소처럼 흙속에 반쯤 묻혀 있던 것을 파냈는데, 그 덩어리가 너무 커 처음에는 단순히 유리 덩어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 돌을 실험실로 가져가 살펴 본 결과, 거대한 유리 덩어리로 생각했던 것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가장 크고 게다가 품질까지 우수한 다이아몬드의 원석으로 밝혀졌다. 자그마치 3106.75캐럿(621.2g)에 달했다. 그런 크기의 다이아몬드를 본 적이 없던 그가 유리 덩어리로 생각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웰스는 이 다이아몬드를 발견한 보상으로 10만 달러를 받았으며, 그 다이아몬드는 광산 설립자이며 소유자였던 토머스 컬리넌의 이름을 따 ‘컬리넌(Cullinan)’이라고 명명되었다.
컬리넌은 80만 달러의 가격에 트란스발 정부(영국의 식민 정부)에 팔았으며, 이를 구입한 트란스발 정부는 1907년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Edward VII, 1841~1910)의 생일선물로 영국에 보냈다. 이 다이아몬드를 영국으로 보내는 과정은 마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극비작전으로 수행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영국군 장교의 호위 아래 영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 7세는 그때까지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를 가공해서 명성을 높이고 있던 암스테르담의 아셔 다이아몬드사에 세공을 의뢰했다.
다이아몬드 세공 전문가인 아셔 형제에게도 그 돌은 가공하기에 너무 큰 돌이었다. 형제는 한 달여 동안 다이아몬드를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어떻게 다룰지 궁리했다. 이들은 끝내 컬리넌을 조각내기로 했다. 아셔는 미리 파 놓은 홈에 철제 클리버 날을 올려놓고 쇠망치로 내리쳤다. 하지만 컬리넌은 조각나기를 거부한 채 클리버 날만 날아 갔다. 그러나 연이은 시도로 컬리넌은 비교적 큰 9개의 덩어리와 96개의 작은 조각들로 분리되었다. 가장 큰 조각은 530.20캐럿의 서양 배 모양으로 가공되어 ‘컬리넌 I’로 명명되었고 영국 왕의 홀(笏)에 장식되었다. 이 돌은 ‘아프리카의 별’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크기의 돌은 ‘컬리넌 II’로 명명되었으며, 317.40캐럿으로 쿠션형태의 사각형으로 세공되어 왕관에 사용했다. 지금의 영국 제국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보석이 바로 이것이다. ‘컬리넌 III’으로 명명된 94.40캐럿의 보석과 ‘컬리넌 IV’로 명명된 63.60캐럿의 보석은 다른 왕관에 장식되었으며, 이 둘은 왕관에서 떼어 내면 펜던트와 브로치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컬리넌 II, III 그리고 IV는 모두 ‘아프리카의 작은 별’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7세는 컬리넌에서 나온 105개의 조각 중, 가장 큰 세 개를 제외한 나머지 102개는 세공한 대가로 아셔 형제에게 주었다. 그러나 19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이스 보타 총리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아셔 형제로부터 나머지 모두를 사들였다. 이는 영국 왕실에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컬리넌이 낳은 최상의 다이아몬드는 결국 모두 영국 왕실의 보석이 되었다.
사실 세계 최대의 다이아몬드는 컬리넌이 아니라 이보다는 약간 더 큰 3167캐럿(633.4g)으로 브라질에서 발견된 카보나도(carbonado)이다. 이 돌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보석용으로 사용할 수 없는 흑색의 다공성 물질로 전체 체적의 30% 정도가 기공으로 되어 있다. 다공성이기는 하지만 이 돌의 경도는 보석용의 다이아몬드와 같다.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이 돌은 약 26~38억 년 사이, 지질시대로는 시생대 말기에 외계에서 지구로 날아 온 운석의 파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돌은 다른 보석용 다이아몬드가 산출되는 지역의 킴벌라이트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특정한 퇴적층 내에서만 산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