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브랜드의 헤처 모여 전략
패션 브랜드가 ‘헤쳐 모여’를 실시하고 있다. 여러 라인을 하나로 통합하고, 더 강력한 존재감을 뽐내기 위한 계략이다. 하나의 이름 아래 모이는 패션 리퍼블릭 이야기.
지난 11월 3일, 버버리의 크리스토퍼 베일리는 집안을 구획하던 벽을 허물겠다고 발표했다. 프로섬(컬렉션 라인), 런던(클래식 라인), 브릿(캐주얼 라인)으로 나뉘던 브랜드를 하나의 ‘버버리’로 합하겠다는 얘기다. “럭셔리 고객의 행동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스타일은 어느 때보다 유연하고, 쇼핑하는 방법에 이런 유연함이 반영되고 있죠. 우리는 변화를 통해 새로운 고객 행동에 좀더 직관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겁니다.” 크리에이티브와 비즈니스 모두를 맡고 있는 브랜드 대장의 설명이다. “하나의 라벨로 통합함으로써 버버리 컬렉션은 일관된 경험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런던 켄싱턴 파크에서 열린 2015 F/W 컬렉션 현장에선 어디에도 프로섬이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었다. 6개월 전, 같은 쇼장 텐트 정문에서 ‘Prorsum’이라는 단어가 관객을 맞던 것과 달라진 풍경이다. 이를 시작으로 2016년 말까지 브랜드 통합이라는 거국적 명제를 성사시키겠다는 것이 버버리 하우스의 입장이다. 이에 대해 런던 패션의 대모이자 미국 <보그> 패션 에디터 사라 무어는 “타당한 결정”이라고 반응했다. “런던의 본사에서 디자인한 코트를 누군가 칭찬했을 때 ‘이거 버버리야’라고 답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바야흐로 패션계에 ‘통합과 화합’의 장이 열리고 있다(얼마 전 세상을 떠난 어느 전직 대통령이 생전에 주장하던 그것). 올 초 마크 제이콥스는 세컨드 라인이었던 ‘마크 바이 마크 제이콥스’의 문을 닫고 그냥 마크 제이콥스로 모든 것을 아우르겠다고 발표했다. ‘마크 바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케이티 힐리어와 루엘라 바틀리 듀오가 뉴욕에서 새 컬렉션을 선보인 후 한 달 만의 결정이었다. “단 한 번도 마크 바이를 세컨드 라인이거나 저렴한 라인이라고 여긴 적 없습니다”라고 디자이너는 설명했다. “패션이 다양한 가격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죠. 이제 마크 제이콥스 브랜드 안에서 여러 가격의 아이템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판매 중인 ‘앨리스 인 원더랜드’ 캡슐 컬렉션이 ‘마크 바이’ 라벨을 단 최후의 제품이 될 것이다. 대신 내년부터는 ‘마크 제이콥스’라는 브랜드 아래 뉴욕 컬렉션 디자인과 지갑을 비롯한 ‘엔트리 아이템’이 함께 소개된다.
마크 제이콥스가 세컨드 라인을 없애고 있을 때, 다른 곳에선 반대 결정을 내린 브랜드도있다. 2015년 6월 은퇴를 선언한 도나 카란은 80년대부터 일하는 여성들의 동지였던 메인 라인의 잠정적인 폐점 사인을 내걸었다. 대신 ‘디퓨전 라인’이었던 DKNY만 지속시키기로 결단했다.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퍼블릭 스쿨’의 듀오 디자이너인 다오이 초와 맥스웰 오스본이 브랜드의 횃불을 이어받았다. 아쉽게도 더는 도나 카란 특유의 바이어스 컷 드레스는 만날 수 없겠지만, DKNY를 대표하는 캐주얼한 아이템은 보다 더 동시대적 형태로 볼 수 있다(듀오의 첫 DKNY 컬렉션을 두곤 의견이 분분했지만).
패션계가 흔히 쓰는 ‘접었다’는 표현은 케이트 스페이드에서도 사용됐다. ‘새터데이’ 브랜드를 없애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빅토리아 베컴은 데님 라벨을 세컨드 라인에 흡수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디자이너 김재현의 ‘프리미엄 라인’이었던 쟈뎅 드 슈에뜨가 럭키슈에뜨로 흡수됐다. “쟈뎅 드 슈에뜨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닙니다. 플래그십 스토어를 비롯해 주요 매장에서는 계속 만날 수 있습니다.” 브랜드 담당자의 설명대로 디자이너 김재현을 대표하는 테일러드 아이템과 드레스 등은 캡슐 컬렉션의 형태로 존재할 예정.
그렇다면 패션 브랜드의 통합과 화합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거에는 경기 불황이나 만족스럽지 못한 실적이 브랜드의 통합을 이끌었다. 지금은 더 강력한 브랜드를 만들어 세상에 힘을 과시하려는 계획이 숨어 있다. 사실 패션에서 브랜드 ‘슈퍼파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최근 런던의 브랜드 경영 연구소 LC2 Inc.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더욱더 강력한 브랜드일수록 디지털 세상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는 것. 랄프 로렌, 휴고 보스, 버버리, 캘빈 클라인, 구찌, 마이클 코어스,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은 오프라인 럭셔리 시장에서 약 25%의 점유율을 지닌다. 그러나 온라인 판매 점유율은 무려 65%. 인터넷이 패션 민주주의를 가져왔지만,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를 향해 고객의 지갑이 열리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풍경을 강 건너 불 보듯 바라보는 인물도 있다. 꼼데가르쏭의 레이 가와쿠보는 날이 갈수록 문어발처럼 브랜드 라인을 확장하고 있다. ‘슬하의 자녀’만 해도 무려 13개(꼼데가르쏭, 꼼데 꼼데, 셔츠, 플레이, 블랙 등), 준야 와타나베와 다오 구리하라, 후미토 간류, 게이 니노미야 등 이른바 꼼데 사단으로 불리는 인물들이 전개하는 라인이 여섯개(트리콧, 간류, 누아르 등), 여기에 액세서리와 향수, 각종 협업까지 보태면 브랜드는 무한정 늘어난다. 꼼데가르쏭이라는 견고한 파라솔 아래 고객의 입맛에 맞게 여러 라인을 선보이는 가와쿠보 여사의 자신감이란.
‘시리즈’라는 한국 브랜드 역시 하나의 우산 아래 다채롭게 활동하고 있다. 시리즈(편집매장 및 캐주얼 남성), 에피그램(포멀한 남성복에 수입 리빙 아이템), 셔츠 바이 시리즈(비즈니스맨을 위한 셔츠), 바이 시리즈(온라인 편집몰) 등등. 여기에 2016년에 론칭할 카페 브랜드 ‘올모스트홈’까지 더하면 시리즈 공화국은 더 확장될 예정. “시리즈라는 브랜드가 다채로운 모습으로 한국 남자들을 만나길 원합니다. 옷은 물론 리빙 아이템과 카페까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통합은 물론이죠.” 막강한 브랜드 아래 더 많은 고객을 품을 각양각색의 매력을 갖추는 일. 요즘 브랜드 왕국의 비밀은 여기에 숨어 있다.
(출처:V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