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는 거니?
거리에 넘쳐나는 간판, 전단지, 그라피티 속 글자들이 패션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가볍거나 혹은 묵직하게.
까막눈, 백지 상태 아이의 눈, 여행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하나의 커다란 갤러리다. 자주 접하지 않은 낯선 단어는 글자라기보다 상형문자에 더 가깝다. 반듯반듯한 획은 간결한 현대미술 작품으로, 꼬불거리는 선은 마치 추상화가의 그림같이 느껴진다. 이렇듯 글자는 패션에서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의미가 중첩된 이미지로도 활용된다. 10여 년 전,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팝계의 요정이던 시절, ‘신흥 호남향우회’라고 쓰인 튜브톱 드레스를 입은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돌체&가바나가 2002년 월드컵 때 한글의 조형미에 매료되어 만든 명품 드레스다, 혹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먼 친척이 분명 한국의 호남 지방 출신일 것이다’ 라는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트리기도 했다. 한글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나갔다는 우쭐함까지 더해져 누군가의 어깨는 괜히 하늘 높이 솟아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하이엔드 편집숍 도버 스트리트 마켓에서는 요즘 ‘자살’이라는 한글이 담긴 티셔츠를 익스클루시브 아이템으로 판매 중이다. 지난 4월 론칭하자마자 힙스터들의 SNS 지분을 차고 넘치게 차지한 안티소셜 클럽은 LA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로 레터링 후드, 트레이닝 팬츠, 볼캡 등 스트리트 패션 아이템을 주로 판매한다. 그리고 ‘Mean People Suk(나쁜 사람들은 꺼져라)’, ‘Get Wired(미쳐보자)’, ‘Last Time was Last Time(과거는 과거일뿐)’ 등 악동들의 입에서 뿜어나올 법한 독한 말들을 적어 넣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믿음, 소망, 사랑 같은 희망적인 문구를 담았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흥미로운 건 격한 표현, 자극적인 문구일수록 인기가 높다는 사실. 제품이 올라오자마자 솔드아웃을 기록하는 건 물론이고 사이트 어디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이 브랜드를 이끌고 있는지, 어떤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인지 일절 언급하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 불친절함에 더 매력을 느끼는 듯 보인. 마치 나쁜 남자인 걸 알면서도 자꾸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자들처럼.
패션 디자이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지금 느끼는 감성을, 품은 생각이나 사상을 표현하고자 옷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터링 아이템은 생각을 전달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이 아닐까. 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담아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표현하는 방식 또한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러시아 디자이너 고샤 루브친스키의 스테디셀러 아이템인 러시아 글자 로고 아이템은 패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의 폭이 계속 넓어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옷 좀 입는 젊은이들이 패션의 변방 러시아의 문자 키릴어를 새긴 티셔츠와 스웨트셔츠에 이토록 열광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심지어 그의 2014 F/W 첫 컬렉션을 보고 WWD의 리뷰는 무척 냉담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샤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신흥 호남향우회’ 한글 옷과 일맥상통한다. 단어가 내포한 의미는 그리 중요치 않고, 낯선 아름다움에 끌려 레터링 아이템을 택하는 심리와 같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외국인은 한글 중에서도 눈사람이 모자를 쓰고 있는 듯한 ‘ㅎ’을 특히나 좋아한다고 한다. 히읗이 무려 다섯 개나 들어간 ‘신흥 호남향우회’는 그녀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사뭇 궁금하다.
(출처: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