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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귀걸이

2016.03.1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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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라면 귀걸이

남자연예인 귀걸이.jpg

길을 지나다 보면 귀를 뚫은 젊은 남성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나이 드신 어른들은 염색도 모자라 이젠 귀까지 뚫었다며 그들을 비난하기 바쁘다.

우선 ‘귀고리’와 ‘귀걸이’의 차이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귀에 거는 장신구를 통칭하는 귀고리는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식(耳飾)·이당(珥)·이환(耳環)이라고도 쓰는데, 귀고리는 글자 그대로 귀에다 다는 고리를 말하며 단지 귀에 거는 귀걸이와는 다르다. 원시사회나 고대사회에서 귀에 고리를 단다는 것은 귀를 뚫어서 고리를 끼운다는 의미인데, 이는 장식용이 아니라 주술적인 의미가 강했다.

대부분 귀걸이는 여성이 하는 장신구고, 남자가 귀걸이를 하는 것은 서양문화에 물든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고유의 남성 귀걸이 문화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 신라시대
선덕여왕 신라 귀걸이.jpg

                                                                                                                  <사진출처: 드라마 선덕여왕>
대표적인 것이 신라의 화랑이다. 젊음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귀걸이를 많이 하고 다닌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성별이 확인된 국내 남성 귀고리 1호 착용자는 경기 김포 양촌리에서 발굴된 3세기 초 금귀고리의 주인이었다. 당시 이 일대를 지배한 나라는 백제였다.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고구려, 백제, 신라 외교관의 모습을 그린 '왕회도' 등을 보면 귀고리를 착용한 삼국시대 남성들의 모습이 있다.

 

2. 고려말 조선초
고려 길태미.jpg

                                                          <고려말 조선초를 다룬 “육룡이 나르샤”>

 

3. 조선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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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조선시대 초기를 다룬 순수의 시대>

이처럼 1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조선 남자들의 귀고리 문화는 17세기 들어와 갑자기 사라진다. 
신체발수지부모.png                                                                                                   <사진출처 : 조선왕조실톡>

1572년 선조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고 거론하며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사내아이들이 귀를 뚫고 귀고리를 달아 중국인들에게 조소를 받으니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로는 오랑캐의 풍속을 고치도록 하라. 한양은 이달을 기한으로 하되 혹 따르지 않는 자는 헌부가 엄하게 벌주도록 하라"고 전교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왕명으로 금지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오랜 전통을 이처럼 갑자기 금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효'는 핑계일 뿐 실제로는 귀고리 때문에 금과은의 수입이 늘어나 국가 경제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선조 30년(1597) 10월이면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일인데, 당시 명나라 사신 접반사 이덕형이 경리 양호와 나눈 이야기 속에서 “근자에 조선군대가 군공(軍功)을 다투는 과정에서 함부로 조선사람을 죽여 거짓으로 왜적인 양 꾸미는 일이 있다”는 추궁을 받았다. 이에 이덕형이 “가짜왜적이라면 좌우의 귀를 살펴보아 귀고리 구멍을 뚫은 흔적이 있으면 알 수 있다”고 대답했는데, 이덕형은 왜적과 조선인을 구분하는 유력한 단서로 귀고리구멍을 들고 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인들 특히 남성들의 귀고리는 일반적이었다.

또 하나 흥미 있는 기록은 선조 38년(1605) 4월에 함경도 순찰사 서성이 여진족 건가퇴를 토벌할 때 당시 조선장수들이 생살의 원칙도 없이 군공을 세우기 위하여 백성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있다는 폐단을 상주한 일이 있었다. 여기서도 귀고리를 달고 백발을 풀어헤친 노파까지 죽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당시 귀고리가 남성만이 아니라 백발이 성성한 노파까지도 착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귀고리는 젊은 여성의 장신구라기보다는 남성이나 노인이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그 뒤에는 이런 습속이 뜸해져서 조선후기에는 상층계급 부녀자들이 의식이나 혼례 때 착용하는 정도였다. 인조는 왕비를 맞을 때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서 오랑캐풍속의 일종인 구슬귀고리를 왕비에게 예물로 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귀고리는 대체로 여성이 하고 있으며, 야간의 외출·연회 때는 반짝이는 보석을 낮에는 반투명·불투명의 화려한 것을 사용한다. 반면 멋쟁이 젊은 남성들은 간단한 고리모양의 귀고리를 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알고 보면 조선시대 남성들이 착용했던 귀고리 모양과 유사하다. 그리고 요즘 젊은 청년들이 머리는 묶어서 뒤로 말총모양으로 하고 헐렁한 바지를 착용한 것 또한 조선시대 상투 틀고 헐렁한 무명한복을 입은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무조건 남성청년의 귀고리가 서구에서 온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척 단견이다. 옛날 우리 민족은 각박한 성리학적인 굴레 속에서도 나름의 멋을 내면서 귀고리나 갖은 장신구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단발령 때 보였던 민족적 반감은 어쩌면 머리카락을 자른 것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일본침략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귀고리문화의 전통을 알고서 귀고리를 하는 청년이 있다면 그 청년이야말로 조선시대 멋쟁이 사대부 청년의 전통을 계승한 민족문화의 수호자(?)일지도 모른다.

 

<출처: 옛날에는 남자도 귀걸이를 했나요?,google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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